맨해튼 브류클린교 이야기 “성공! 거저 되는 일은 없다”
미국 뉴욕시는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탠튼 등 다섯 개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약 400여 년 전(1626년), 인디언에게 24달러를 주고 샀다는 맨해튼 섬은 오늘날 세계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맨해튼에 연결된 다리는 많은데, 걷기에도 좋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다리로는 브루클린 다리가 단연 손꼽힌다.
브루클린 다리는 존 A 로블링이 설계했고, 그의 아들 워싱턴 로블링과 그의 아내에 의해서 무려 14년에 걸친 공사 끝에 1883년에 완공되었다. 이 다리가 개통될 당시에는 이 다리는 '세계 8대 불가사이'의 하나로 꼽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다리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브루클린 다리는 아직도 인간이 만든 기적의 하나이자, 뉴욕시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평가받고 있는 다리라고 한다. 19세기 당시, 통행량은 많았지만 넓고 물살이 센 이스트 강을 건너는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건축가인 존 A 로블링은 이곳에 다리를 놓을 것을 생각하였고, 지형적 특성상 강 중간에 교각이 없는 다리를 짓는다는 설계를 내 놓았다. 설계도를 본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비웃었고, 당시의 기술 수준으로 이런 다리를 건설한다는 것은 기술자들은 물론,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허가를 받아내기 위해 뉴욕시 당국자들을 쫓아다니면서 다리가 필요한 이유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우여곡절 끝에 정부의 승인을 받았고, 공사 자금이 모여 다리 건설에 착수했다. 그런데 공사가 시작되기 직전인 1869년, 존 A 로블링이 페리와 선착장 사이에 발이 끼어 그만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고, 그는 3주 만에 '파상풍 합병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그에게는 워싱턴 로블링이라는 엔지니어 기술자인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다리 건설을 아들이 책임지게 된다. 1870년 1월3일 다리 건설 공사가 시작되어 선두 지휘하며, 전력을 다해 다리 건설에 매진하던, 1872년 그만 그는 온 몸이 마비되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오랜 시간 물속에서 작업을 하다가 잠수병(潛水病)에 걸렸고, 병에 걸린 워싱턴 로블링 그는 팔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물론, 말을 하거나 들을 수조차 없었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손가락 하나뿐, 이런 상황이면 포기 할만도 한데 위싱턴로블링은 그러지 않았고, 피나는 노력과 혼신을 다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끝에 손가락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까지 고안해 냈다.
그의 아내, 에밀리 워렌 로블링은 브루클린 다리 완공을 위해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이를 배운 후에, 남편 대신 공사 현장으로 출근을 했다. 아내가 퇴근해서 하루 동안의 일을 남편에게 전해주면 남편은 다음날 해야 할 일을 아내에게 알려 주었고, 그리고 자기는 브르클린 언덕 위에 있는 집 거실 창문을 통해 망원경으로 공사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비장한 각오로 1883년 5월 24일,(140년 전) 드디어 2.7km의 부루클린 다리가 개통되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뉴욕시의 대표적인 유명 다리가 탄생된 것이다. 아름답고 멋진 브루클린 다리 속에 이런 희생과 헌신이 담겨져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현재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내 주위의 편리하고 유익한 삶! 역시 거저 얻은 것이 아니며,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 눈물과 땀이 배어있고 숨겨진 공로가 묻어 있다. 희생 없는 열매는 없고,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의 유익과 인류 발전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며 이름을 알리지 않고, 또 남기지도 않은 많은 사람의 숨은 공로가 묻혀있다는 것을 우리 역시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하겠다.
오늘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 주고 있는 고마운 분들의 숨은 공로에 감사하는 복된 하루되시길 기원한다!! <저작권자 ⓒ 실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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