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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 칼럼] 이승만은 어떻게 6.25를 이겨냈는가

이국영 기자 | 기사입력 2024/06/21 [08:05]

[정재학 칼럼] 이승만은 어떻게 6.25를 이겨냈는가

이국영 기자 | 입력 : 2024/06/21 [08:05]

이승만은 어떻게 6.25를 이겨냈는가

 

우남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것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경험과 지식에서 진실을 근거로 판단한 신념이었다. 1919911일 상해임시정부 출범 이후 임시정부 안에 스며든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레닌은 이동휘로 하여금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게 하였고, 독립군을 프롤레타리아혁명에 이용하고자 하였다. 러시아는 그 무렵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전개되면서, 적백내전(赤白內戰)을 치르고 있었다.

 

문제는 공산주의에 대한 임시정부 요원들의 무지(無知)였다. 그러나 항일운동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임정은 공산당을 수용하였다. 공산당 계열의 대표 이동휘는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리고 1920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고 상해임정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있었다. 참변을 계기로 고려공산당은 힘을 잃기 시작하였다. 오하묵을 비롯한 이동휘 등 공산주의자들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그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시 참변을 겪은 임정지도부 김구 주석과 김좌진 장군 등은 김원봉, 여운형 등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이동휘 국무총리를 해임하였다. 자유시에서 레닌의 지시 하에 독립군을 공격한 것은 고려공산당 소속 오하묵과 그 일당들이었다. 독립군들을 적군화(赤軍化)하여 혁명에 이용하고자 하였던 레닌은 독립군이 소련군에 협조하지 않고 무장해제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오하묵을 시켜 무려 500여명의 독립군을 학살하였다. 이후 대한독립군은 흩어졌고, 김좌진 장군마저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유시 참변은 반공주의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1628일의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반공(反共)에 앞장서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벌이면서 김구 주석의 임정을 후원하여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임정을 지켜주었다. 김구를 비롯한 민족계열 요원들 역시 반공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코민테른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어떤 인간들인가를 직접 피부로 겪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임정 수호에 힘을 쓰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이승만에게 36만달러라는 막대한 현상금을 걸고 있었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은 문제가 있었다. 위아래 상하 질서도 없는 불학무식한 자들이 어른을 모르고 동지를 칭하거나 삿대질하며 대드는 태도를 보면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승만은 평소 충효를 절대의 가치로 보는 한편 예를 중시한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사람을 재주나 능력 있는 사람보다 좋아했고, 책임 있는 자리에 앉은 인사들의 재능과 학력보다는 인간됨을 더 중요시했다. 늙고 병든 아버지나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목숨을 바쳐 나라에 충성하며, 동포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겠느냐고, 평소 반문(反問)하곤 하였다. 이런 이승만에게 공산주의자들의 무례(無禮)한 행태는 용서할 수 없는 불학무식(不學無識)이었을 것이다.

 

해방이 되어 이승만이 귀국하고, 남로당 박헌영의 정판사 화폐위조 사건에 이어 대구폭동, 제주4.3 공산폭동에 이어 여순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욱 굳어진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이 공산주의자들과 맞서야 하는 일이 최우선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19485.10 선거를 통해 8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날을 건국절로 기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기 위한 위대한 건국이었던 것이다.

 

1. 6.25 그날

 

이승만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밖에 없다고 판단할 수 있다. 교수협회와 전교조 등 주사파 세력들의 세뇌교육에 영향을 받은 얼치기 학생운동권과 민주당과 진보당 세력들도 이승만을 싫어한다. 이유는 단 하나, 이승만으로 인해 6.25전쟁에서 패배하고 적화통일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빨갱이냐 아니냐는 기준에서 이승만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이념의 좌우를 가리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좀더 설명하자면, 북한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을 극도로 싫어하고 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김일성의 6.25 남침을 현명하게 극복하여 대한민국을 수호한 것은 더욱 증오를 부추기는 일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북한이 이승만을 증오하는 대표적인 이유일 것이고, 이 점이 북한을 추종하는 주사파 공산노예들이 북한과 더불어 이승만을 싫어하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의 공산혁명을 차단한 위인(偉人)이 바로 이승만이라는 점을, 그들도 증오를 통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6.25일 새벽 438선 전 지역을 걸쳐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다. 6.26일 의정부가 함락되고, 6.27일 새벽 4시 이승만은 피난을 떠난다. 그 즉시 2712시에 창동 방어선이 붕괴되고, 28일 오후 230분 한강교가 폭파된다. 북한군은 3일을 서울에 머문다. 그리고 73일 한강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이다.

 

좌파 혹은 주사파들은 627일 피난을 떠난 이승만을 향해 서울시민을 두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쳤다는 비난을 한다. 그렇다면, 피난 가지 않고 북한군에게 이승만이 사로잡혔다면 어찌 됐을까. 대한민국 대통령이 잡혔다면, 포로가 된 이승만이 모든 국군과 국민들에게 무기를 놓으라 명하고 항복을 선언했다면, 대한민국은 어찌 되었을까. 이승만은 차마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26일 의정부가 함락되자 비로소 피난길에 오른다.

 

이승만은 74일 방송을 통해 피난한 이유를 설명하고 전쟁 극복을 위해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리라는 각오를 말한다. 그리고 질서를 요청한다. 이승만은 서울시민에게 닥칠 혼란을 경계하였다. 만약 피난을 지시했더라면, 겨우 다리 하나 있는 한강으로 서울시민들이 몰려들고 후퇴하는 국군과 뒤섞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러므로 이승만은 무책임하게 서울시민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북한군과 빨갱이들은 점령한 서울에서 수많은 학살을 저지른다. 대학병원에 수용된 부상병들을 몰살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인민재판을 벌여 처단하기 시작한다. 이승만도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도 없는 무리들이라는 점을 이승만은 진정 몰랐던 것이다.

 

다음은 6.25 전 과정이다.

 

1950625: 북한의 새벽 4시 기습남침

1950. 626: 의정부 함락

1950. 6274: 이승만 피난

1950628: 서울 함락

195071: UN군 개입

195084: 낙동강 방어라인 구축

1950915: 인천상륙작전

19501019: 평양 점령

195011: 중공군 침략

195114: 1.4 후퇴

1951~ 1953: 공방전

1953.618 : 반공포로 석방

1953727: 휴전 협정

1953. 917: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죽음과 빨치산 궤멸

 

2. 유엔 참전

 

전쟁 발발을 안 이승만은 즉시 맥아더와 통화를 하며 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대통령비서관이었던 민복기 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맥아더 원수가 잠을 깨면 이렇게 전하시오.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 한국에 있는 미국인 2,500명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

 

이에 맥아더는 629일 수원비행장에 도착하여 한강방어선을 시찰한다. 이때 감격적인 국군 병사와의 일화(逸話)가 있었다. 맥아더는 한강방어선에서 만난 일등중사 계급장을 단 병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언제까지 그 호 속에 있을 것인가?”

이에 병사는 답한다.

 

각하께서도 군인이시고 저 또한 군인입니다. 군인이란 모름지기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저의 상사로부터 철수명령이 내려지든가, 아니면 저는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이곳을 지킬 것입니다.”

 

이에 맥아더는 크게 감동하여 그 병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원병력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한다.

 

630일 맥아더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은 미군 파병을 결정한다.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트루먼은 25일 남침 당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고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군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 회원국들에게 한국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원조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같은 트루먼의 결정에 유엔 또한 59개 회원국 중 33개국이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을 지지하면서 영국을 필두(筆頭)로 유엔의 깃발 아래 몰려들었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에 최고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맥아더가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고, 마침내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다.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서 714일의 일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부산이 아니라 대전에 있었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후 미군철수를 반대하면서, 소련과의 냉전을 통찰하여 코민테른의 공산블록과 자유블록으로 재편된 세계가 정면충돌로 폭발할 것이라는 경고를 반복하여 주장하였다. 미군이 한국을 떠나면 미국 전체가 피를 흘릴 날이 닥칠 것이라며 한반도에서 미군철수를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1949년 여순반란이 마무리되자 한반도를 떠났고, 19507월 유엔군과 함께 한반도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불과 1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724일 유엔군사령부가 설립된다. 6.25 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한 것은 유엔의 평화수호를 위한 기본정신에 입각한 사상 최초의 진단행동이었다. 또한 이는 집단안전보장원칙을 점검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참전국은 모두 21개국이었고 16개국이 전투병력을 파견하고 5개국이 의료지원단을 보냈다. 그 외 40여 국가가 물자를 보냈다. 카스트로 혁명 이전의 쿠바도 물자를 보내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므로 중국은 6.25 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는다)전쟁으로 부르나, 사실은 중국공산군이 유엔의 지시를 어기고 유엔을 상대로 벌인 불법 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3.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동포들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이승만 불멸의 업적인 반공포로의 석방(1953. 6. 18부터 21일까지)이었다.

 

19533월 이래 휴전회담이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에서 그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된 이승만은 가만있지 않았다. 무수한 동포들이 재산과 생명을 잃은 전쟁이었다.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 온 북한의 침략전쟁을 분단상태로 마감하려는 유엔의 태도는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더구나 공산군의 점령 치하(治下)에서 강제로 의용군에 징집되었다가 포로가 되거나 또 국군 포로로 공산군에 강제 편입되었다가 다시 포로가 된 반공포로를 공산측에 양도한다는 것은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휴전은 일종의 자살행위이며 필요하다면 한국군만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국민들도 통일정책을 지지하여 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계속되었고, 1953512일에는 포로 관리를 위한 인도 군인의 입국마저도 거부하고 나섰다. 휴전 조건으로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에 관한 아이젠하워의 친서를 이승만에게 보내 휴전에 동의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국 대표로 하여금 휴전협상을 거부할 것을 지시하기에 이른다.

 

66일에 비로소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에게 휴전성립 후에 한미방위조약을 교섭할 용의가 있으며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 원조를 계속할 것을 약속하였다. 드디어 68일에는 한국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양측은 포로송환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반공 포로의 송환을 놓고 한국 정부의 태도가 가장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였다. 미국은 한국 정부를 무마하기 위하여 이승만의 미국방문을 청하였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한 채, 618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사전 예고도 없이 한국포로 감시원에게 명하여 2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석방시켜 버렸다.

 

이승만은 이것이 자기의 명령임을 명백히 하고 군경에 대하여 석방된 반공포로를 보호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돌발사태 속에서 공산측은 미국을 이승만의 공범자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한편, 미국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음을 해명하기에 바빴고 단지 휴전 교섭만큼은 파기시키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이승만의 승리였다.

 

기록에 의하면, 반공포로 석방과 관련하여 이승만의 여러 일화(逸話)들이 있는데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원용덕 헌병사령관을 불러 자신이 왜 이것을 하려는지 그 뜻을 밝혔다고 한다.

 

반공(反共)포로들은 포로라고 생각할 수 없는 우리의 동포요 애국청년이었고, 그들을 구하는 것은 의무라는 것이 이승만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승만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나는 내 신분의 권한으로서 전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이 조치를 단행함에 있어서 유엔군 당국 및 관계 당국과 전연 협의 없이 진행한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제네바 협정 및 인권을 위해 반공 포로들은 석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아이젠하워 특사로 파견된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더이상 휴전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이승만을 설득하러 방한했을 때, 이승만은 계속해서 화제를 돌려 신변 잡담으로 대화 시간을 끌었다. 초조한 특사단이 반공포로 석방 문제를 꺼내려 하자, 이승만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때마침 경무대 숲을 날고 있는 까치 한 쌍을 가리키며 태연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 모습이 얼마나 자유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나는 반공 포로를 공산 지옥으로 보내느냐, 광명의 이 땅에 머무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근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번 조처를 감행한 것입니다.”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아래와 같은 일화(逸話)를 기록한 사람은 후일 서울경찰청장을 지낸 창랑 장택상이었다.

 

- 반공포로 석방으로 국제적인 물의가 꼬리를 물고 일어날 때였다. 영국 의회에서는 수만명의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이 박사를 체포하라는 결의까지 나오고 있었는데, 포로 석방 1주일 후에 서울에서 이 박사를 뵙게 되었다. 아직 정부가 서울에 환도하기 전이었다.

 

"그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일반의 여론은 어떠한가?"

"선생님, 잘된 처사라고들 합니다."

 

이 박사는 한동안 나를 응시하더니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러나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여는 것이었다.

 

"내가 오늘은 솔직한 고백을 할테야. 일생을 통해 감옥을 드나들고 사형 선고를 받아도 눈 하나 깜짝 안한 나야. 그런데 이번 반공포로 석방 후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들어봐, 내 개인으로서야 설혹 불행해진다 하더라도 관심 밖의 일이야. 무엇보다 국운이 풍전등화인데 나라가 망하지나 않나 해서 실은 무척 초조했어?"

 

말을 채 맺지 못하는 그의 눈시울에는 평생 처음 이슬방울이 내비치는 것이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평생 후회가 없는 이 박사였지만, 약소국가의 원수로서 분명 주권을 행사하고 나서 적지 아니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다. 영국 의회에서 유엔군 사령관으로 하여금 이승만 대통령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이 박사가 휴전협정에 가담 안한 것은 그가 정치가로서 탁월한 일면이라고 창랑 장택상은 기록한다.

 

4. 휴전

 

그러는 가운데 전투는 계속 진행되었고, 특히 한국군의 방어선에 대한 집중 공격이 행하여졌다. 경계선을 확정하려는 마당에 오히려 상황이 불리하게 진전되었으므로 711일 마침내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였다. 이때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교섭과 경제원조 제공, 한국군의 증강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약속한다.

 

이로써 19537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31개월에 걸친 전쟁은 중지되고 휴전이 성립되었다. 마침내 미군이 주둔하고 현재까지 70여 년이 지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군의 보호 속에서 산업화를 완성시키고, 자주국방을 실현시키는 한편 소원하던 선진국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과 타협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말이나 문서로 체결한 국제협정을 단 한번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지금 타협한다고 해도 그들이 그러한 협정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 공산주의자들이 누구인가를 정확히 파악했던 이승만이었다.

 

5. 맺음말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이승만은 1941년 일본이 태평양의 여러 국가를 식민지 삼아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내용의 일본내막기라는 책을 펴낸다. 이 책은 진주만 기습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고, 미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승만이라는 이름은 독립투사로서 미국인들에게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방 후 한반도에 진주한 하지 중장은 이승만의 귀국을 알리는 방송을 하도록 허락한다. 이 방송을 들은 국민들은 이승만이라는 존재에 대해 폭발적인 인지도를 높이게 된다.

 

이승만의 외교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건너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강대국 미국에서 세계를 보는 안목을 키워갔던 것이다. 따라서 누구보다 먼저 공산주의의 악랄함과 허구를 깨달았던 이승만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 초대 건국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민족의 비극 6.25를 현명하게 이겨낸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도 발아래 엎드리게 한 그의 외교력은 오랜 미국생활 속에서 익힌 외교적 지식과 감각 덕분이었다. 이승만은 누구보다 미국을 잘 알았고, 누구보다 공산주의자들을 잘 알았던 우리 민족의 진정한 영도자였다.

 

6.25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국시(國是)를 반공으로 하는 반공국가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반공적 국가질서를 확립하고 194812월 제정된 국가보안법을 더욱 강화하였다. 지금도 북한인민공화국을 추종하는 자들이 있으나, 전쟁은 이러한 흐름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좌파 성향의 흐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중반 진보당의 등장과 그리고 당수 조봉암(曺奉岩)이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00만표를 득표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오늘날도 진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민주당 진보세력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이승만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이라는 비극을 대한민국을 다시 정립하는 기회로 삼았다. 동포를 향한 뜨거운 애정과 일제강점기 비극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하려는 독립정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기도. 이승만은 1965년 필자의 나이 10살 무렵에 하와이에서 운명하신다. 기억 속의 이승만 대통령은 자애로운 할아버지셨다. 항상 그랬듯이 4.19를 일으킨 학생들 앞에서도 불의에 항거하는 그 용기를 칭찬하셨던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승만의 원대한 설계 하()에 꾸려진 나라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을 이루는 한편 초등의무교육 실시 및 학교 건립 확대, 한미상호방위조약, 평화선 선포 등 이승만은 원자력연구소를 세워 원자력을 연구토록 지시하였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어 경제발전의 기틀을 쌓아나갔다. 이 바탕 위에 박정희 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혹자(或者)는 이승만을 독재자라 하나, 그건 전쟁 이후에도 준동하는 북한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방어(防禦)였다. 오히려 이승만은 강렬한 민족주의자였고 박애주의자였으며 진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을 떠날 때 프란체스카 여사 외에 아무도 따라나서지 못하게 하였다. 단 한 푼의 돈도 가지고 나간 사실조차 없다.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승만은 가난한 삶을 살았다.

 

눈물이 앞선다. 그리하여 필자(筆者)20246월을 맞이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께서 6.25 피난길에 영부인 프란체스카 님께 하셨다는 말씀을 눈물 속에서 전하는 것이다.

 

"마미(프란체스카), 내가 부산으로 가지 않는 것은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미군들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지금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그나마 싸우지 부산으로 갔다 하면 언제 대구를 내놓을지 모를 사람들이거든."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에서 -

 

2024. 5. 19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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