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정(松汀)의 시니어 명심보감 울기에 좋은 장소로다! 울 만하구나 이런 천지 사이에 큰 시야를 만나고서
好哭場! 可以哭矣 遇此天地間大眼界
박지원(1737-1805)은 조선 정조 때의 문장가 실학자로 자는 중미(仲美)호는 연암(燕巖)으로 자신의 삼종형이자 사절단의 수장인 금성위 박명원의 자제 군관 자격으로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칠순잔치) 축하 사절로 중국의 북경(연경)에 갈 때 일행에 합류하여 러허강(열하강)까지 다녀온 후 보고, 듣고, 느낀 감상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것이 유명한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연암은 35살에 과거시험을 접고 10여 년을 실학 공부에 매진하여 45살에〈열하일기〉를 세상에 내놓으며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으며, 북학론을 주장하였고, 이용후생(利用厚生)의 實學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 영조 시대에 두 개의 별이 있었으니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이었다. 그때는 문화 문명이 꽃피웠던 르네상스 시대였다. 정조는 11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성질이 난폭한 폭군으로 변할 수도 있었으나 억울함과 울분, 분통으로 부터 벗어나 4살 때부터 책 읽기를 통해 포용과 지혜를 얻어 성군으로 태어났다. 그 시대에 연암과 다산이 나온 것이다.
‘열하일기’의 구성은 26권 10책으로 정본없이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이 처음 간행하였는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친필본이 단국대학교 〈연민문고〉에서 발견되었다. 도강록(渡江錄)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일신수필(馹汛隨筆)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중국 기행 중 수레제도에 대해 그 원리를 알고, 모든 수레의 바퀴와 바퀴 사이의 간격을 통일해 길의 바큇자국이 한가지가 되도록 하고 있음을 안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수레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레는 물건을 싣고 동서남북 이동하여 물자가 교환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의 백성의 살림살이가 가난한 까닭은 국내에 수레가 다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죄라고 말한다. 연암은 귀국하여 조선에 알려야겠다고 쓰고 있다.
연암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책은〈사기〉로 여기에서 강렬한 현실비판 의식과 인간 중심 사상을 배웠다. 박지원에게 배울 수 있는 또 하나는 메모습관이다. 1780년 비가 주룩주룩 오는 여름철 44살인 박지원은 중국 베이징에서 3개월 동안 겪은 모든 여정과 느낌을 메모했다. 치밀하고 철저한 메모로 쓴 〈열하일기〉는 100여종이 넘는 중국 여행기를 제치고 당대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읽혀지고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열하일기 첫 번째 도강록에서 요동벌판을 보고 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 손을 들어 이마에 얹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말했다. (立馬四顧, 不覺擧手加額曰) “울기에 좋은 장소로다! 울 만하구나.” (好哭場! 可以哭矣) 정진사가 말했다. “이런 천지 사이에 크나큰 시야를 만나고서 (鄭進士曰: “遇此天地間大眼界) 천고의 영웅은 잘 울었고, 미인은 많은 눈물을 흘렸지.(중략) (千古英雄善泣, 美人多淚)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서 뛰어난 예지력으로 다가올 선진사회에 대한 설파를 그치지 아니하고 조선의 빈곤한 원인을 수레나 배 같은 운송수단 및 도로망 건설의 부족과 실학을 등한시 한 채 성리학의 관념론에 갇혀 무위도식하고 있는 선비들 때문이라고 보았다. 서양에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있다면, 한국에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다. 구한말 한학자 김택영은 “열하일기는 조선 5천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이다”라고 하였다. <저작권자 ⓒ 실버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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